1953년 왓슨과 크릭은 유전자의 본체인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냈다.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으로 전통 생물학은 분자생물학으로 급격하게 재편됐고, 오늘날에는 물리학과 화학, 공학과 융합되면서 가장 촉망받는 21세기 학문분야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DNA가 새로운 컴퓨터의 세계를 열만큼 공학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왜 DNA와 IT 기술 융합이 시도되는 것일까?
1946년 에니악(ENIAC)이 탄생했다. 세계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였지만 무게가 30톤에 성능은 오늘날 싸구려 계산기보다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분자생물학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실리콘 컴퓨터는 지난 60여 년 동안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며 체스나 그림처럼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간주됐던 분야까지 잠식해 들어 왔다.
컴퓨터의 발전 속도는 반도체 메모리의 집적도가 증가한데 힘입음 바가 크다. 그러나 실리콘 컴퓨터의 미래가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반도체의 집적도를 높이는 것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 곧 그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DNA 컴퓨터다.
DNA 컴퓨터는 말 그대로 DNA 분자를 이용하는 분자컴퓨터(molecular computer)다. DNA 컴퓨터는 분자들의 결합을 이용한 것인데, 컴퓨터 공학자인 아들만(Leonardo M. Adleman)이 1994년 고안해 냈다. 아들만은 DNA가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마치 컴퓨터에서 정보가 처리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DNA 컴퓨터를 착안해 냈다.
DNA는 인산과 당, 염기로 구성된 뉴클레오티드가 길게 결합한 분자로 A(아데닌), T(티민), G(구아닌), C(사이토신) 4가지 종류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 DNA 분자들은 스스로 조립되는 자기조립 능력, 다른 분자를 인식해서 결합하는 분자 인식 능력, 그리고 자기 복제 능력이 있어 정보를 전달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 즉 실리콘 컴퓨터에서 ‘0’과 ‘1’을 이용해 2진수로 계산을 하듯 DNA에서는 A, T, G, C의 4개의 염기를 이용해 정보를 전달한다. DNA의 특징은 A와 T, G와 C가 서로 상보적인 결합을 한다는 점인데 이것을 이용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DNA 컴퓨터는 폰노이만 구조의 컴퓨터처럼 순차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병렬적인 계산방식을 사용한다. DNA 분자 개개의 결합 속도는 느리지만 3차원으로 배열된 엄청난 수의 분자들이 동시에 반응에 참여하는 병렬 연산을 통해 연산 속도를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 이는 마치 1,011개의 뉴런이 1,014개의 시냅스 연결을 형성하고 있는 인간의 뇌가 수많은 뉴런을 동시에 연산에 참여시키는 병렬 연산을 통해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와 같이 기존의 실리콘 컴퓨터가 가지지 못한 인간의 뇌가 가진 장점을 모방한 것이 바로 DNA 컴퓨터다.
또한 건조된 DNA 1g으로 CD 1조 장의 정보를 저장할 만큼 대용량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으며 반도체 컴퓨터에 비해 전력소모가 매우 적다는 것도 DNA 컴퓨터의 매력이다. 아들만은 DNA 컴퓨터로 외판원 문제(외판원이 각 도시를 모두 경유하는 최소한의 경로를 찾는 문제)를 해결해 DNA 컴퓨터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아들만 이후 한동안 새로운 개념의 DNA 컴퓨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사실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DNA 컴퓨터를 생각만큼 빠르게 만들기 어렵고 생화학적 분자들을 에러 없이 제어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실리콘 컴퓨터의 발전도 꾸준히 이루어져 실용적인 측면에서 DNA 컴퓨터가 그 자리를 대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DNA 컴퓨터는 단순히 빠른 연산을 하는 것 이상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DNA를 이용하면 실리콘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재료를 만들 수 있다. 그 재료는 바로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graphene)이다. 그래핀은 실리콘 보다 100배 이상 전하를 잘 전달하면서도 강도가 우수하기 때문에 차세대 반도체 재료로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원자 하나 두께인 그래핀을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의 스탠퍼드대에서는 자연의 분자 조립자인 DNA를 이용해 그래핀 트랜지스터를 만들었다. 포스텍에서는 백금 이온이 DNA의 인산기와 잘 결합하는 성질을 이용해 ‘DNA-그래핀 하이브리드’ 물질을 개발하기도 했다. 고가의 백금을 적게 사용하면서도 효율이 좋은 백금촉매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것은 DNA 분자의 폭이 3.4나노미터(nm)로 미세하면서도 분자를 효과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로봇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DNA 컴퓨터가 보여주는 놀라운 미래의 모습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DNA 컴퓨터는 영화 ‘이너스페이스’에서와 같이 소형 잠수정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 병을 치료하는 것을 실현시켜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 기존의 로봇 공학으로는 이렇게 작은 분자 로봇을 만들 수 없었으며 여러 가지 물리적인 이유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도 등장하기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DNA 컴퓨터는 정확하게 프로그램에 따라 세포를 찾아내 명령을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정상세포와 다른 암 세포를 발견하고 죽일 수 있다. 즉 프로그램 된 DNA 컴퓨터가 주사를 통해 사람의 몸속으로 투입되면 암세포를 발견하고 결합한 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DNA 컴퓨터는 사람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나노로봇의 개념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병에 걸리면 우리 몸에 투입된 수많은 DNA 로봇들이 병균을 격퇴하게 되는 꿈과 같은 일이 DNA 컴퓨팅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DNA를 만들어 냈고, 인간은 DNA로 새로운 컴퓨터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글 : 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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