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와과학

말라리아 퇴치 역사적 첫발을 딛다, 말라리아 백신 최초 승인(KISTI)

조조다음 2021. 12. 6. 06:30

지난 10월 6일, 세계 보건 기구(WHO)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등 말라리아 감염률이 높은 지역에 말라리아 백신 ‘RTS,S’(영국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개발, 제품명 ‘모스퀴릭스’)의 사용을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1986년 벨기에에서 처음 개발된 이 백신은 6년 전인 2015년 유럽의약품청(EMA)의 사용 승인을 받은 바 있으나, 이번 WHO 승인은 말라리아 감염 피해가 높은 지역에 백신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도록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은 2019년 아프리카 서부 가나‧동부 케냐‧남부 말라위의 어린이 약 80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시범 접종 결과를 기반으로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말라리아, 특히 열대열 말라리아 원충(P. falciparum)에 의한 감염은 수 세기 동안 아프리카 지역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말라리아로 인한 연간 사망자 40만 명 중 절반 이상(26만 명)이 5세 미만 아프리카 어린이다. 백신을 개발하려는 국제 사회의 오랜 노력에도 감염병의 주범이 바이러스가 아닌 기생충이라는 난점 때문에 성과를 보기 어려웠다. 말라리아 백신 보급의 첫 단계까지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인지, RTS,S 백신에 어떤 원리가 적용되었는지 등을 예방 효과를 높이기 위한 여러 조치와 함께 살펴보자.
생김새도 머무는 곳도 때마다 다른, 기생충의 복잡한 생활사
말라리아 해결이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말라리아 백신 자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과 암컷 모기를 오가며 변화하는 말라리아 원충의 생애 주기와 이 기생충 특유의 유전적 복잡성에서 비롯된다. 
말라리아 원충은 모기의 장(腸)을 터전으로 삼아 포자소체(sporozoite)로 자란다. 포자소체란 수정 후 형성된 포자가 낭포체 분화 후 가늘고 긴 핵을 가진 형태로 변화한 것인데, 암컷 모기가 사람을 물면 모기의 침샘을 타고 인간의 혈류에 주입된다. 인간의 관점에서 말라리아 감염이란 이 시점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혈관을 타고 간세포로 이동한 포자소체는 한동안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무성 생식으로 조용히 증식할 뿐이다. 늘어난 포자소체는 분열소체(merozoites) 형태로 변한 후 간세포 소포에 담겨 방출되고 폐 모세 혈관에 정착한다. 적혈구를 침범한 분열소체는 포자소체 단계 때와 달리 헤모글로빈을 양분으로 삼아 ‘시끄럽게’ 증식한다. 적혈구를 파괴하고 주변 적혈구로 이동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말라리아의 주 증상인 발열, 발한이 나타난다.
분열소체 증식으로 파괴된 적혈구가 가득 쌓인 감염자는 비장 폐색과 각종 합병증을 겪으며 사망에 이른다. 한편 말라리아 원충은 이미 인간에서 모기로 되돌아갈 채비를 마친 상태다. 분열소체 중 일부가 배우자 세포, 곧 성숙한 성세포로 발전하면 모기가 감염된 인간을 물 때 모기의 침샘을 타고 이동, 수정체에서 포자소체로 자라났던 첫 단계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말라리아 원충은 인간과 모기 사이를 오가며 수정체-포자소체-분열소체-배우자 세포 등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바꾼다. 문제는 각 생애 주기 단계마다 인간 면역계에 제공되는 항원이 수천 개에 이르러 어느 것이 말라리아 백신 개발에 유용한 표적인지를 알아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이 기생충이 인간 외에 침팬지, 고릴라 등을 감염시키며 100종 이상으로 분화했다는 점 때문에 적합한 신종에 의한 위협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B형 간염 백신 개발 경험에 힘입어 만든 RTS,S 백신
그렇다면 RTS,S 백신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할까? 1980년대 후반 GSK와 미 육군 월터 리드 육군 연구소(WRAIP)는 방사성 감쇠 포자소체가 말라리아 면역에 중요하다는 기존 연구에 착안, 포자소체 막단백질(CSP, Circumsporozoite protein)을 면역 반응의 표적 물질로 삼았다. 한동안은 유의미한 임상 효능을 내지 못하다, B형 간염 백신 개발 경험을 쌓은 한 연구원이 CSP 중심 반복 구간의 운반체로 B형 간염 표면 항원(HBsAg)을 활용하면서 활로를 찾게 되었다.
RTS,S라는 백신명은 이 구조의 각 영역에서 유래했다. R은 CSP의 중앙 반복 구간을, T는 T-림프구 에피토프(면역 세포가 여러 결정기를 가지게 하는 아미노산 서열)를 말한다. RT 펩타이드 결합체는 HBsAg의 말단과 유전적으로 융합된다. S(surface, 표면) 부분은 효모 세포에서 함께 발현될 때 CPS와 S를 모두를 표시하는 바이러스 비슷한 입자를 생성한다. 마지막으로 S는 RTS 구성 요소에 자발적으로 융합되지 않는 HBsAg를 말한다. 여러 구역으로 나뉜 CSP 항원의 고도로 반복적인 특성은 인간 면역계가 강한 항체 반응, T 세포 반응을 보이도록 한다.
백신 예방률은 39%… 이중 접근으로 희망 찾다
그런데 WHO가 참고한 시범 접종 결과에 따르면 RTS,S 백신의 말라리아 예방률은 39%, 중증 예방률은 29% 수준에 그친다. 접종을 네 번에 걸쳐서 해야 한다는 것도 큰 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이미 내성을 보이는 치료제 단독 접근 방식에 기대기보다 백신과 치료제를 병행한 이중 접근을 할 때의 이점이 훨씬 클 것이라고 말한다. 시범 접종 결과 이중 접근 시 입원율과 사망률이 이전보다 70% 감소했고, 말라리아로부터 보호받는 어린이 비율도 70% 미만에서 90% 이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미 체계가 잡힌 접종 시스템을 활용해 말라리아 예방 접근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전문가의 희망적인 예측에 힘을 실어 준다.
WHO의 글로벌 말라리아 프로그램 책임자인 페드로 알론소 박사는 이번 백신 도입 승인에 대해 안전하고, 중간 정도의 효과가 있으며, 위험 지역에 배분할 준비가 된 말라리아 백신이 갖춰진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 기생충에 대한 1세대 백신을 보유하는 것은 과학적 관점에서 엄청난 도약”이라고도 말했다. WHO 승인 다음 단계는 세계 백신 면역 연합(GAVI)의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코로나19 백신 배포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는 지금, 말라리아라는 또 다른 인류의 적을 겨냥한 WHO의 결정이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글: 맹미선 과학칼럼니스트/일러스트: 이명헌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