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와과학

못 배운 과학자의 위대한 업적 (KISTI)

조조다음 2012. 10. 6. 18:09

 

 

지난 9월, 한국영화계의 비주류, 아웃사이더로 손꼽히는 김기덕 감독이 영화 ‘피에타’로 제 69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해 주목받았다. 그간 흥행률 저조, 평단의 혹평 속에도 묵묵히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영화 관련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꾸준히 수상할 만큼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인정받고 있다. 과학기술계에도 소위 이런 류의 이단아들이 있다.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관련종사자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과학기술계에 기여한 과학자들. 그들의 업적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오늘날 우리생활에 꼭 필요한 가전제품으로 빼놓을 수 없는 전자레인지는 우연한 기회에 발명됐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퍼시 스펜서’라는 한 과학자의 끊임없는 노력 뒤에 탄생한 결과물이다.

미국의 공학자이자 발명가였던 퍼시 스펜서(Percy Spencer, 1894~1970)는 미국 메인주(州)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어머니에게도 버림받아 남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어려운 가정을 돕기 위해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교육만 받은 채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제지공장에서 일했다. 밤에는 공부를 하며 기계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 생활을 하던 중, 16세 무렵 그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제지공장에서는 전기를 설치하기 위해 관련 기술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퍼시는 책으로만 알던 내용을 직접 시험해 보기 위해 사장을 설득했고, 갖은 시행착오 끝에 전기를 설치하는데 성공한다. 관련 서적을 독학해 얻은 실력임에도 다른 기술자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그 후로 그는 메사추세츠 주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전기 기술자로 통했다.

해군에 입대해서는 학력을 속이고 무전병과를 지원해 삼각함수, 미적분, 화학, 물리학, 야금학 등을 배우게 된다. 관련 분야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그의 실력은 나날이 늘어갔다. 제대 후 25세의 나이로 레이시온이라는 무전장비회사에 들어간다.

1945년,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로 근무하던 그에게 일생의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레이시온에서는 마그네트론을 제조하고 있었는데, 마그네트론이 작동 중이던 실험실에 들어갔던 퍼시가 주머니에 넣어둔 초콜릿 바가 녹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마그네트론은 마이크로파 신호를 생성하기 위한 진공관으로 당시 레이더에 필수적인 장치였다.

이 우연한 사건에 호기심을 느낀 퍼시는 초콜릿 바가 녹은 이유와 마이크로파와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해 연구를 진행한다. 우선 옥수수 알맹이를 마그네트론 옆에 놓아두었다. 그러자 알맹이가 터지며 팝콘으로 튀겨졌다. 다음날은 달걀을 옆에 두어 달걀을 익게 만들었다. 이를 본 퍼시는 마이크로파가 음식 조리에도 쓰일 수 있다고 추측하고 오늘날 전자레인지라고 불리는 상자를 만들어냈다.

레이시온은 이 발명을 요리에 적용하기로 결정하고 보스턴의 한 레스토랑에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실험과 개량을 통해 마침내 1947년 첫 번째 전자레인지인 ‘레이더랜지(RaderRange)’를 만들어냈다. 최초의 전자레인지는 높이가 무려 167cm, 무게는 340kg에 달하는 ‘거구’의 장치였다. 가격은 무려 5,000달러로 가정용으로는 보급될 수 없는 사양이었다. 하지만 냉동식품을 빨리 해동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레스토랑이나 항공사 등에서 이용됐다.

가정용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는 1952년부터였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팔려나간 시기는 1970년 이후였는데, 이미 퍼시가 사망한 다음이었다.

“교육 받은 과학자들은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에 대해 미리 예단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퍼시는 무엇이 불가능한지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퍼시의 동료 과학자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식으로 교육받지 못했지만 아이 같은 호기심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기의 발명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전자레인지 외에도 그는 생전에 무려 225개의 특허를 획득했다.

오늘날 예술과 과학을 모두 아우르는 융합형 인재로 꼽히는 다빈치 역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빈치는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업적이나 그의 작품이 끊임없이 과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과학자로 불려도 부족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공증인이었던 아버지와 그의 시중을 들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두 부모 모두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서 사생아가 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당시 사생아는 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로부터 성도 물려받지 못했는데, 다 빈치(Da Vinci)는 ‘빈치 지역의’라는 뜻이다.

그가 15세가 되던 해, 공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스승인 베로키오 곁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여러 예술가들을 지켜보았다. 30세에는 밀라노에서 화가이면서 동시에 군사 기술자, 건축가로 활동하면서 해부학, 광학, 지질학, 천문학, 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몰두한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에는 무서울 정도로 몰입했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붓을 놓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하는 경우도 많았다.



해부학에도 관심이 많던 그는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시체 한 구당 일주일 이상 해부하며 세밀하게 관찰해 스케치로 남기기도 했다. 당시 시체를 보관할 냉동기술이나 방부제가 없었음에도 총 30구 이상 해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 역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과학자로 꼽힌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통찰력으로 전자기학의 기초를 쌓았으며 평생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위해 무료 강연을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어쩌면 이들 외에도 수많은 과학도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못 배웠기에 오히려 겸손했고, 남들보다 더 성실히 노력한 그들의 성과는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지 않을 것이다.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