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큰아버지와 사촌인 민희언니가 놀러와 태연은 마냥 들떠있다. 그런데 아빠와 큰아버지의 표정은 상당히 어둡다. 조용조용히 뭔가 심각한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 가끔씩 민희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민희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지난 여름방학 때에 비해 성격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 대는 것이 좀 이상해 보이기는 했다. 태연은 작정하고 둘의 대화를 엿듣는다.
“민희가 자꾸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얘기 좀 해보려고 왔어. 태연아빠 네가 좀 관찰을 해봐 주라. 지난봄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거든. 생각보다 충격이 컸나봐. 하지만 이제 몸무게도 거의 회복이 됐는데, 아직까지도 방황을 하는 걸 보니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음… 형,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민희가 하는 행동과 비슷한 게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1) 몸무게가 심하게 줄었다. 2)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를 싫어하고, 모임에도 가지 않는다. 3) 채소만 먹으려 하고 무지방, 제로 칼로리 등에 집착한다. 4) 너무 많이 몸을 움직이거나 무리해서 걸어 다닌다. 5) 쉽게 울적해지거나 참을성이 없어지고 화를 잘 낸다. 6) 몰래 폭식을 하는 것 같다.(냉장고 속 음식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자녀 방에서 과자나 음식 봉지 등이 발견된다.) 7) 몰래 토하는 것 같다.(화장실에 들어가면 토한 냄새나 흔적이 있다. 밤에도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고 머무는 시간이 길다.) 8) 변비약 봉지가 발견된다. 어때요?”
“와, 귀신이다. 어떻게 알았니? 민희가 계속 그러고 있어! 밥도 잘 안 먹고, 가끔 냉장고가 텅 비어 있기도 하는데다 밤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더라고. 또 하루 종일 화만 낼 때도 있고. 난 남자친구랑 헤어진데다 사춘기가 겹쳐서 그런가보다 했지.”
“저런~, 앞에서 얘기한 건 청소년 섭식장애 환자들을 구별하는 방법이에요. 민희가 하는 행동과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면, 아무래도 민희가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섭식장애는 크게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나뉘는데, 거식증은 심하게 말랐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아예 거부하는 병이에요. 반면 폭식증은 음식을 강하게 갈망하지만 살이 찌는 것이 두려워 실컷 먹은 뒤 토해내거나 변비약을 먹는 병이지요. 겉보기에는 그다지 마르지 않았지만 먹는 것을 자제하지 못했다는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매우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하곤 하죠. 제 생각엔 민희가 거식증에서 폭식증으로 넘어온 게 아닌가 싶어요.”
큰아버지는 뜻밖의 말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하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충격이 왜 하필 섭식장애로 온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다.
“흔히 섭식장애는 지나친 다이어트 욕망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이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어요. 심한 불안감을 느꼈거나 스트레스를 받았거나, 완벽주의 성향인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수단으로 체중조절을 선택하기도 하고, 50% 정도는 유전적인 원인도 있어요. 아마 민희는 스트레스를 체중조절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 청소년의 3.2% 정도가 섭식장애를 앓고 있고, 치료를 받지 않는 청소년까지 합치면 10% 가까운 아이들이 섭식장애를 앓는다는 통계도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흔한 병이에요.”
“정말…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하는 거냐?”
“예, 하루라도 빨리 받는 게 좋겠어요. 섭식장애, 특히 거식증에 걸리면 심장병이나 골다공증 같은 병에 쉽게 걸릴 수가 있거든요. 거식증 때문에 영양결핍이 오면 심장의 근육이 줄어들고 제 기능을 못해서 심장판막증 같은 병을 일으킬 수 있어요. 게다가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으면 10% 정도는 사망할 수도 있다고 해요. 또 식욕이 떨어지면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 분비량이 줄어드는데, 이 호르몬이 줄면 칼슘이 뼈로 흡수되지 못해서 키도 안 크고 골다공증이나 골절의 위험까지 높아져요. 더구나 청소년 시기는 뇌 발달이 이뤄지는 결정적인 시기이기 때문에 섭식장애를 겪으면 커서도 감정조절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형, 마음이 아프겠지만 정신과를 빨리 찾아가보세요.”
“민희가 이렇게 심각한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여태 혼내기만 했구나. 다 내 잘못이다. 그래도 과학자인 작은아빠가 있어서 일이 더 커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진짜 고맙구나 아우야~.”
“그런데 형, 지금 민희 몸무게가 어떻게 돼죠? 좀 많이 빠진 거 같긴 하던데.”
“많이 회복됐는데도 아직 83kg이야. 갑자기 10kg이나 빠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니까.”
여기까지 엿듣던 태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빵 터져버리고 만다. 깔깔깔! 웃다 못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아 진짜, 왜들 이러시는 거예요~. 섭식장애에 걸린 83kg이 세상에 어딨냐고요! 아무리 큰아버지가 123kg이라고 해도, 민희언니를 섭식장애로 오해하는 건 진짜로 너무해요. 깔깔!! 언니가 10kg이 갑자기 빠진 건 친구랑 살빼기 내기를 했기 때문이고요, 가끔 냉장고가 텅 빈 건 언니가 뚱땡이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먹어치웠기 때문이고요, 밤마다 화장실을 들락거린 건 새로 생긴 남자친구에게 몰래 전화를 하기 위해서였다고요!!”
“저, 정말? 그게 정말이니 태연아? 우리 민희가 그토록 정상적인 생활을 해왔던 거야? 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감사합니다. 네 아빠보다, 태연이 네가 진정한 은인이로구나!”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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