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와과학

유전자 이름이 ‘주당’ 된 사연, 과학자들의 작명 센스 (KISTI)

조조다음 2013. 1. 25. 16:39

 

 

이름이란 ‘사람이나 사물 등에 붙여서 그 전체를 한 단어로 대표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이름은 그 대상 자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당장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름을 신성하게 생각하거나 각종 금기와 결부시킨다는 점만 생각해 보아도 이름이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알 수 있다.

과학에서도 이름은 꽤나 중요하다. 당장 세계의 모든 과학자들이 언어나 문화, 국적에 관계없이 동일한 대상을 동일하게 지칭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혼란이 크겠는가. 따라서 학술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은 단 하나여야 하며 이름에 대한 우선권은 선착순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동식물학자나 관측천문학자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가 남들보다 더 많은 셈이다.

이렇듯 이름은 중요하지만 반드시 심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별명에 해당하는 호에 재미있는 뜻이 담긴 것이 많듯, 과학자들도 자신이 발견한 것에 장난스레 이름을 붙이곤 한다.

생물학은 새로 발견되는 종이나 변종, 아종들도 많고 이런저런 생화학 물질이 자주 발견돼서 새로운 이름들이 종종 탄생하는 분야다. 그만큼 재미있는 작명 사례가 많고 과학자들이 반쯤 장난삼아 재치 있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많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애기장대의 돌연변이종 ‘Oresara’가 있다.

애기장대는 두해살이풀로 냉이나 꽃다지와 같은 십자화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재배가 쉽고 유전체(Genom) 크기도 작아서 식물 연구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 이 식물 중 평균 수명보다 오래 사는 돌연변이종인 ‘Oresara’는 노화 연구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변종의 발음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한국인 원어민이 맞다. 이름의 의미는 발음 그대로 ‘오래살아’다. 포스텍 남홍길 교수가 1999년 발견해 ‘사이언스’지에 이 유쾌한 이름으로 발표했다. 논문에서도 “oresara means ‘long living’ in Korean”이라며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남홍길 교수의 기발한 명명법은 현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행동유전학을 연구하고 있는 김우재 박사에게도 영향을 줬다. 남홍길 교수가 오래살아를 발표하고 1년 후, 당시 포스텍에 입학한 김 박사는 교내에 개화가 늦은 벚꽃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 주고 주변 지인들에게 이를 소개했다. 이 벚꽃나무에 붙인 이름은 ‘Zola Anziara’. 유럽 어딘가에 사는 사람 이름처럼 보이지만 발음을 빠르게 읽어보면 무슨 의도로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대담한 이름을 공식적인 학명으로 만들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 벚꽃나무가 실제 별도의 돌연변이종으로 밝혀진 것도 아니고 김 박사가 장난삼아 붙인 이름일 뿐이지만, 혹시 아는가. 과학계에서는 최초 발견자의 의사를 존중하니 새로운 돌연변이종으로 확인되고 논문에 게재하면 정식 이름이 될 가능성이 있을지 말이다. 과학의 위대한 발견들은 과학자들의 장난스런 호기심에서 시작되곤 한다.

예쁜꼬마선충(이름이 아예 ‘예쁜꼬마선충’이다)의 알코올 저항을 늘리는 유전자의 이름으로 ‘주당’도 있다. 서울대학교 이준호 교수가 2008년 BBRC(Biochemical and Biophysical Research Communications)에 발표한 논문에서 친절하게도 “These ethanol resistant mutants were named ‘jud’, the abbreviation of ‘JUDANG’ (a Korean word meaning “being tolerant to alcohol”).”이라고 설명했다. 술을 많이 마셔대는 바로 그 ‘주당’에서 이름을 따왔음을 확인해 준 것이다. 주당의 영어 표기에서 따와서 이 유전자에 대한 약자는 ‘jud’를 쓴다. 주당 유전자의 이름을 원래는 ‘SOJU(Supressor Of JUdang)’로 지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다행히 그만뒀다고 한다.

사실 과학에서의 이름은 대개 대상의 특징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으로 사용한다. 대상의 특징을 명료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기억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각성성분인 ‘카페인(Kaffein)’만 하더라도 커피(Kaffe)에 들어있는 물질(-in)이라는 너무나도 단순한 이름이다. 옴개구리의 등껍질에서 발견된 ‘개구린’, 한국 살모사의 독극물에서 발견한 ‘살모신’, 거머리에서 추출한 항응고물질인 ‘거머린’ 등이 모두 동일한 원칙에 따라 작명된 사례들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이름들이다. ‘오래살아’나 ‘주당’도 이런 이름인 동시에 과학자들의 재치가 더해져 탄생한 작품이다.

그러나 때로는 대상의 특징은 뒷전이고 개인의 취향이 상당부분 개입된 명칭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닉 헤지호그’ 유전자. 헤지호그 유전자는 세포간 신호전달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로 발생 과정에서 조직과 기관의 분화나 형태 유지 등에 영향을 준다. 헤지호그는 초파리를 이용한 연구에서 이 유전자에 이상이 있으면 초파리 유충의 등 쪽에 가시 같은 돌기가 돋아나오는 것이 고슴도치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978년 헤지호그 유전자군이 발견된 이래 과학자들은 유사한 유전자를 찾아낼 때마서 선례를 따라 고슴도치 종명을 이름으로 붙였다. 그렇게 발견된 유전자가 ‘인디언 헤지호그(Ihh)’, ‘데저트 헤지호그(Dhh)’ 등이다. 우리말로는 인도 고슴도치와 사막 고슴도치로 각각 인도 북서부와 중동의 사막에 산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얌전하던 헤지호그 유전자군 이름에 현실이 아닌 가상세계에 사는 유전자가 등장하니, 바로 ‘소닉 헤지호그’ 유전자다.

하버드 의대의 유전학교실에서 1993년 발표한 논문에는 소닉 헤지호그 유전자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논문에서 리들과 존슨 등은 헤지호그 유전자군 중에서도 다리 등 사지를 배아에서 유도해내는 단백질을 생성하는 유전자를 찾아냈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소닉 헤지호그라는 이름을 붙인 것. 소닉 헤지호그는 일본의 한 비디오게임 기업이 창조한 게임 주인공이다. 옛날의 국내 오락실에서도 ‘바람돌이 소닉’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인기 게임이다.

생물학자들은 재미가 붙었는지 소닉 헤지호그 유전자가 발표되고 나서 ‘에키드나 헤지호그’와 ‘티기윙클 헤지호그’를 연달아 발표한다. 에키드나는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뱀인 그리스 신화의 괴물이고 티기윙클은 베아트릭스 포터의 동화 시리즈, 피터 래빗에 나오는 고슴도치 아주머니의 이름이다.

급기야 일본 오사카 바이오사이언스 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에 ‘피카츄린’까지 등장했다. 피카츄린은 망막의 신경회로를 유도해내는 단백질로 망막의 신경회로를 유도하는 단백질로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처음 발표됐다. 전기를 이용해 공격하는 피카츄와 빛을 받아들이는 시신경이 유사해 보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은 일본 과학자들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어서 식물 유전자 중에는 ‘슈퍼맨’이나 ‘크립토나이트’ 같은 이름도 눈에 띈다. 물론 이런 이름들도 뜬금없이 붙인 것은 아니고 발견한 유전자의 특징을 빗댄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진지하고 어렵게만 보이는 과학 곳곳에는 과학자들의 기발한 재치가 녹아 있다. 과학자들은 대상의 특징 뿐 아니라 명명자의 취향이나 고민까지도 드러내는, 훌륭한 작명가이기도 하다.

글 : 김택원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