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과 파일럿 연결! 합체 완료!”
2013년 7월 개봉한 SF 영화 ‘퍼시픽림’에는 높이 80m 이상의 초대형 로봇 ‘예거(jaeger)’가 등장한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출몰하는 거대 외계괴물 ‘카이주(kaiju)’를 무찌르기 위해 만든 인류의 최종병기다. 예거 조종은 로봇과 신경을 연결한 사람이 담당하는데 특이하게 2인 체제를 구축했다. 거대한 몸집이라 한 사람의 신경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이며 로봇을 조종하는 건 생각처럼 간단치 않다. 그래서 영화 속에는 아주 멋진 장치가 하나 더 등장한다. 뇌신경을 연결해 둘이 하나가 되는 방법, ‘드리프트(drift)’다.
드리프트는 두 사람의 뇌를 연결해 기억과 직관, 전투 스타일 등을 공유하는 작업이다. 여기에 성공하면 두 사람은 몸을 똑같이 움직이는 건 물론이고 정신적인 모든 것까지 공유하게 된다. 영화 속 주인공 남녀도 드리프트를 통해 어린 시절은 물론 숨기고 싶은 상처까지 단숨에 알아버렸다. 빛의 속도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환상적인 장면을 보노라면 이런 일이 현실에서도 가능할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퍼시픽림’이 개봉된 지 한 달 뒤에 현실에서 드리프트를 연상시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이 사람끼리 뇌를 연결한 실험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 그려진 것에 비하면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실제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뇌 신호를 직접 전하는 인터페이스를 성공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실험을 주도한 라제시 라오(Rajesh Rao) 교수는 10년 이상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연구해왔는데 이 분야가 더 발전하면 ‘뇌-뇌 인터페이스’ 개념도 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다. 이번 실험에는 몇 년 전부터 뜻을 함께한 같은 대학 심리학 분야 연구자인 안드레아 스토코(Andrea Stocco) 교수가 동참했다. 이들이 계획한 실험은 한 사람이 뇌 신호를 보내 상대방의 손동작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실험 당일인 2013년 8월 12일, 두 교수는 떨어져 있는 각자의 연구실 앉았다. 뇌파를 보내는 쪽인 라오 교수는 뇌파를 기록하는 전극을 가진 모자를 썼고, 뇌파를 받기로 한 스토코 교수는 역시 뇌를 자극하는 기능을 가진 보라색 수영 모자를 착용했다. 손동작을 제어하는 기능은 뇌의 왼쪽 운동피질이 담당하므로 스토코 교수의 모자는 이 부분을 자극하도록 설계됐다. 두 사람이 쓴 장치는 스카이프(Skype)로 연결됐지만 서로 상대방의 화면은 볼 수 없었다.
이 상태에서 라오 교수는 컴퓨터 화면을 보며 간단한 비디오 게임을 했다. 그는 표적에 대포를 쏴야할 때 오른손을 움직여 발사 단추를 누르는 상상을 했을 뿐 실제로 오른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컴퓨터 화면을 보지 않은 채 귀마개를 하고 있던 스토코 교수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움직여 키보드의 스페이스바를 눌렀다.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비록 오른손을 움직이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라오 교수가 생각만으로 스토코 교수를 움직인 건 사실이다. 앞으로 진행될 연구에 더 눈길이 가는 이유다. 여기에 쓰인 기술이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니다. 우선 두피에 전극을 붙여 뇌의 전기적 활동을 기록하는 ‘뇌파 전위 기록술(EEG, Electroencephalography)’은 임상의가 뇌 활동을 살피는 데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스토코 교수의 뇌를 자극한 ‘경두개 자기 자극(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은 특정 부분의 뉴런을 활성화해 뇌에서 명령을 보내는 것으로 기존에도 알려졌다. 그러니까 이번 실험은 두 기술을 연결해 동시에 쓰면서 뇌 연결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연구진은 이 실험을 ‘발칸인의 정신 결합(Vulcan Mind Meld)’에 견주기도 했다. 발칸인은 ‘스타트랙’에 나오는 인물인데 제한된 텔레파시 형태로 다른 발칸인의 생각, 경험, 기억, 지식을 공유한다. 이 실험이 앞으로 발칸인처럼 소통할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이야기다.
이 연구가 더 완벽해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스토코 교수는 인터넷으로 컴퓨터 여러 대 연결한 것처럼 뇌를 연결해 각종 지식을 뇌에서 뇌로 직접 전송하는 모습을 전망했다. 예를 들면 사람들 머리에 교과서를 바로 입력하고, 외국어로 말하게 하거나 무술을 배우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또 장애인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전달하는 것은 물론, 갑자기 조종사가 쓰러진 비행기에서 승무원이나 승객의 뇌를 지상 관제국에 있는 사람과 연결해 무사히 착륙하는 상황도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 몸을 통제하는 으스스한 상황이 벌어질까 염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라오 교수는 아직 이 기술이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간단한 뇌 신호를 읽는 단계라고 선을 그었다.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을 조작하는 기술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번 실험의 다음 단계로 연구진은 더 복잡한 정보를 다른 사람의 뇌로 전달하는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여기에 성공하면 더 많은 실험 참가자를 모아 실험을 진행하고 신뢰도를 높일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차근차근 연구하다 보면 뇌로 더 복잡한 신호를 보내고 받는 날도 오지 않을까. ‘퍼시픽림’의 드리프트가 서로를 믿고 화합하는 데 필수적이었듯 뇌 연결 기술도 인류가 서로를 믿고 뜻을 나누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그 날이 오면 세상이 한결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글 : 박태진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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