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굿닥터’에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자폐 3급과 서번트 증후군 진단을 받았지만 천재적인 기억력과 공간지각 능력을 발휘해 훌륭한 소아외과 의사로 성장해 나가는 스토리다.
서번트 증후군은 드라마와 함께 덩달아 관심이 높아졌는데, 최근 ‘스타킹’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실제 서번트 증후군을 보이는 소년이 출연하기도 했다. IQ 50인 14세 정신지체 소년은 아주 능숙하게 피아노를 치는가 하면, 수십 년 전은 물론 수 년 뒤 특정 날짜의 요일을 단 몇 초 만에 정확히 맞췄다. 또 지하철노선도를 통째로 외워 진행자가 ‘4호선’ 하면 오이도에서 당고개까지 수십 개의 역 이름을 줄줄이 읊어대기도 했다.
서번트 증후군을 보이는 이들은 전반적인 지적 능력은 떨어지지만 특정한 좁은 영역에서 비범한 능력을 보여준다. 음악, 미술, 달력 계산, 수학(소수 계산 등), 공간 지각력(길 찾기 등) 등 크게 5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보통 한 사람이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데, 스타킹에 나온 소년도 음악과 달력 계산, 길 찾기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이로운 기억력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자폐성 서번트를 주인공으로 한 1988년 영화 ‘레인맨’의 모델이기도 한 킴 픽은 책 9,000권을 통째로 외우고 있는데, 한 페이지를 읽는데 8~10초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한 마디로 살아있는 스캐너인 셈이다.
2009년 ‘영국왕립학회철학회보B’는 서번트 증후군을 특집으로 다뤘다. 서번트 증후군의 권위자인 미국 위스콘신의대 대럴드 트레퍼트 교수는 개괄하는 글에서 서번트의 절반은 자폐 증상을 보이고 나머지 절반도 뇌질환이나 선천성 이상 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자폐인 사람 가운데 10% 정도가 서번트 증후군을 보인다.
트레퍼트 교수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여러 서번트의 뇌를 연구했는데 그 결과 이들이 공통적으로 좌뇌에 문제가 있거나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 좌뇌의 지배에서 벗어난 우뇌가 능력발휘를 해 서번트 증후군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뇌의 좌우비대칭성은 잘 알려져 있는데 좌뇌는 주로 논리적, 언어적, 추상적 사고를 하는 반면 우뇌는 감각적, 구체적 사고를 한다. 즉 좌뇌가 진화상 늦게 발달했음에도 사람에 이르러 지배적인 뇌로 군림하면서 우리는 ‘이성의 동물’이 됐다는 말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따른다고 좌뇌는 우뇌보다 늦게 성숙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만큼 더 취약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태아의 뇌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문제가 되는데, 이때 특히 좌뇌가 손상을 입는다. 그 결과 자폐아나 정신지체아가 태어날 수 있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호르몬이므로 이런 현상은 남아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 때문에 자폐증은 남자가 여자보다 4배 더 많다.
좌뇌에 문제가 생겨 정신지체가 된 것이 서번트 능력을 갖게 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증명은 어렵지만 그럴 것임이 거의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다. 바로 후천성 서번트의 존재다. 즉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 사고나 질병, 치매로 좌뇌가 손상되면서 동시에 서번트 능력을 갖게 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발성치매인 ‘전측두엽성 치매’로 좌뇌가 점점 손상돼 추상적 사고 능력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동시에 미술이나 음악에서 놀라운 예술성을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시간이 더 지나면 우뇌까지 손상되면서 이런 능력도 사라진다.
호주 시드니대 마음센터 앨런 스나이더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서번트 증후군과 같은 잠재력이 있지만 강력한 좌뇌의 억압으로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즉 좌뇌의 ‘가공된 의식적 기억’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우뇌의 ‘날 것인 무의식적 기억’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 접근하려면 문지기인 좌뇌를 따돌려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에겐 어림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경두개자기자극(TMS) 같은 외부 교란을 통해 일시적으로 문지기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경두개자기자극이란 두피에 전극을 대고 일정 주파수의 자기장을 줘 해당 뇌 부위의 활동이 떨어지게 하는 작용이다. 좌뇌 전두측두엽에 경두개자기자극을 주면 우뇌가 활성화되고 따라서 서번트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실험을 한 결과 11명 가운데 4명이 그림을 훨씬 더 잘 그렸고 다른 실험에서는 12명 가운데 10명이 화면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의 숫자를 더 정확히 추측했다.
좌뇌가 평소 우뇌의 서번트 능력을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인지심리학자인 베티 에드워즈 미국 LA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는 1989년 출간해 100만 부가 넘게 팔린 책 ‘오른쪽 두뇌로 그림 그리기’에서 사람들이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건 우뇌의 묘사력을 억제하는 좌뇌의 추상화 성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좌뇌는 대상을 개념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디테일을 무시하고 도식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을 그릴 때 새끼손가락이 가려져 안 보이더라도 ‘사람 손가락은 다섯 개’라는 개념이 관찰을 무시하고 손가락이 다 보이도록 그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좌뇌를 무력화시키면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그렇다. 실제로 그림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에게 한 사람은 제대로 된 피카소의 그림을, 다른 사람은 뒤집어 놓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그리게 했다. 그 결과, 뒤집어 놓은 그림을 보고 그린 경우가 묘사력이 월등했다. 에드워즈 교수는 의식적인 좌뇌를 ‘의식적으로’ 억누르는 훈련을 하면 누구나 어느 수준 이상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번트 증후군인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들의 서번트 능력을 계발하면 전반적인 삶의 질도 개선된다고 한다. 스타킹에 출연한 소년도 음악 선생님이 아이의 음악성을 알아보고 끈질기게 피아노 앞에 앉게 해 이처럼 재능이 꽃피게 했다고 한다. 트레퍼트 교수 역시 “재능을 훈련시켜라! 그러면 당신의 결함도 가려질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비단 서번트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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