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와과학

기억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KISTI)

조조다음 2013. 6. 27. 05:42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만일 살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 조각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저장된다면 어떨까. 한번 본 것이 사진 찍듯 머릿속에 저장된다면 어떨까.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당신은 머릿속이 온통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예요. 그건 평생 과거라는 철창 속에 갇혀 사는 거라고요." - 소설 ‘궁극의 아이’ 中 앨리스의 대사

과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증상을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이라 한다. 이 증후군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며 종종 드라마, 문학 속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등장해 왔다. 장용민의 소설 ‘궁극의 아이’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일명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인 앨리스는 일곱 살 이후 벌어진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몇 백만 명 중 한 명이 생길까 말까 한 희귀한 증세지만, 실제로 전 세계에 수십 명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서프라이즈’라는 TV 프로그램에서는 실제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 적이 있다. 한 외국 여성은 자신의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지난 일들이 마치 일상을 녹화해 놓은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며, 사소한 일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기자가 직업인 한 남성은 자신이 인터뷰한 내용뿐 아니라 며칠 전 편집장이 회의에서 한 말도, 몇 년 전 의사가 한 말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10년 전의 의미 없는 사건도 사진처럼 생생히 저장돼 현재와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기억이 다가 아니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수준의 기억만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기쁨은 물론 슬픔, 좌절, 분노, 고통 등)도 똑같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흔히 과거가 좋은 이유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아픔이건 공평하게 모두 지나간다. 이러한 ‘망각’의 행운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은 과연 일반인과 뇌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내게 과거는 상영 중인 영화 같아요. 멈출 수도, 통제할 수도 없어요.” - AJ

2006년, 뇌과학 분야의 학술지인 ‘뉴로케이스’에는 공식적으로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판정을 처음 받은 여성의 사례가 등장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신경생물학과의 제임스 맥거프 박사가 주도한 이 연구에서 AJ라는 가명의 여성은 11세 이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거의 빠짐없이 기억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후에 밝혀진 여자의 본명은 질 프라이스. 맥거프 박사에게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판정을 받기 전까지 그녀는 35년 동안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에 대해 가족에게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각종 검사 결과 질 프라이스의 기억 능력은 자서전적인 기억에 치중돼 있었다. 학습 영역으로 볼 수 있는 암기력에는 취약했으며 기타 인지능력은 평범했다. 맥거프 박사팀은 일화기억의 인출을 담당하는 좌우 대뇌피질의 특정영역이 일반인과 다른 것 같다고 추측했다. 이후 후속연구에서 그녀의 뇌 영상을 촬영한 결과, 대뇌구조의 24개 영역이 일반인에 비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인은 오래된 과거의 기억을 뇌의 우전두엽에만 저장하지만 과잉기억증후군을 앓는 사람은 우전두엽과 좌전두엽에 모두 저장한다. 물론 이것이 과잉기억증후군의 모든 이유로 볼 수는 없다. 밝혀지지 않은 의문들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이런 초인적인 기억력을 나타내는 증상으로 서번트 증후군도 있다. 이는 자폐증상을 가진 사람 중 극히 일부에서 나타나는 증후군으로 암기능력이나 음악, 미술 등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한다. 영화 ‘굿윌헌팅’, ‘레인맨’ 등에는 이 증후군을 앓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특히 레인맨의 실제 모델이었던 천재 킴 픽은 1만 2,000여 권의 책을 암기한다고 알려졌다. 영국의 화가 테판 윌트샤이어는 자폐증을 앓고 있지만 놀라운 기억력을 이용해 도시와 건축물의 모습을 정밀하게 그려낸다.

세계 명 지휘자 ‘로린 마젤’도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악보를 한번 보고 기억했으며 교향곡을 통째로 외우는 천재소년이었다. 이런 기억력을 포토그래픽 메모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눈으로 본 것을 마치 사진 찍듯 머릿속에 저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억력은 일종의 암기력으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과잉기억증후군과는 차이가 있다. 질 프라이스를 비롯해 과잉기억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을 연구한 결과, 학습의 영역과 기억의 영역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기력은 훈련을 통해 어느 수준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기억을 ‘뉴런 사이의 일정한 연결 패턴이 저장된 것’이라고 정의한다. 뉴런은 신경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단위세포를 말한다. 인간의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있고, 각각의 뉴런은 5,000~1만 개의 시냅스를 형성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토대로 계산해 보면 일반적인 성인의 뇌는 총 500~1,000조의 시냅스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미국 의회도서관 장서 15~30배 정도를 저장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 엄청난 시냅스 연결 패턴들은 우리가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변화가 일어난다. 시냅스가 더욱 견고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거나 새롭게 형성되기도 한다. 이 정교하고 신비로운 과정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가득하다. 기억과 망각의 세계, 이를 밝히기 위한 과학자들의 도전이 계속되는 이유다.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