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어느 날, 경주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말이 속보와 습보로 달릴 때 네 발굽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가?” 라는 질문 때문이었다.
말의 걸음걸이는 속도에 따라 크게 평보, 속보, 구보, 습보의 네 가지로 나뉜다. 평상시 ‘터덜터덜’ 걸어가면 평보(walk), 그보다 빠르게 ‘탁탁’ 하고 뛰면 속보(trot), 점프를 뛰듯이 ‘성큼성큼’ 달리면 구보(canter), ‘타가닥타가닥’ 하며 전속력으로 질주하면 습보(gallop)라 부른다.
평보는 발굽이 모두 떨어지는 때가 없고 구보는 몸이 공중에 떠 있는 때가 많아 확실하지만, 속보와 습보는 판단하기가 애매했다. 사람의 눈으로 구별이 안 갈 만큼 빠르고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사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움직이는 물체를 찍기가 쉽지 않았다. 경주마가 달리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들도 땅에 닿은 발굽의 개수를 저마다 다르게 묘사했다.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경마 애호가이자 독지가인 릴런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가 나섰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후일 스탠퍼드대학교를 설립한 인물이다. 스탠퍼드는 개인 자금으로 연구비를 조성해 에드워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를 고용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이브리지는 1830년 영국 태생의 사진가로 25살에 미국으로 건너와 서점을 운영하다가 1860년 여행 중 마차사고로 머리를 다친다. 그러나 요양 중 연마한 사진기술 덕분에 1860년대에는 풍경과 건축물 사진으로 명성을 얻는다.
1870년 샌프란시스코 조폐국을 새로 지을 때는 저속촬영 기법(time lapse photography)으로 건축 상황을 기록해 화제를 불러 모았다. 저속촬영이란 일정한 시간 간격에 따라 사진을 간헐적으로 촬영해 긴 시간을 짧게 줄여 보여주는 기법이다. 스탠퍼드가 마이브리지를 고용한 것도 사진술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방식 때문이었다.
마이브리지는 스탠퍼드 소유의 경주마 옥시던트(Occident)를 데려다 속보로 달리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말은 빠르게 달리는 반면에 사진기의 셔터 속도가 너무 느려 명확하게 판독을 하기 어려웠다.
스탠퍼드는 연구자금 지원을 멈추지 않았고 마이브리지는 마침내 1878년 새로운 촬영법을 개발하게 됐다. 경주 트랙을 따라 12대 또는 24대의 사진기를 1피트 간격으로 늘어놓고 말이 지나갈 때마다 순차적으로 촬영하는 방식이었다. 셔터 속도도 개량해 1,000분의 2초라는 빠른 촬영이 가능했다. 이렇게 찍힌 사진에는 말이 달리는 모습이 순간마다 완벽하게 포착돼 있었다.
마이브리지의 촬영법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속보로 달리는 말의 모습이 담긴 12컷의 사진은 실제 모습을 명확하게 잡아냈다. 말의 움직임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포착한 이 한 장의 사진 덕분에 말발굽과 달리기에 대한 논쟁은 말끔하게 해결됐다. 과학 학술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 1878년 10월호에 마이브리지의 사진이 판화로 재현돼 게재되면서 학술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이듬해 마이브리지는 사진을 연속적으로 이어서 보여주는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를 선보인다. 둥글고 납작한 유리판의 가장자리에 연속 촬영된 동물의 모습을 붙인 뒤 회전시키면 실제 움직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치였다. 스크린에 영화를 비추는 영사기의 원형이라 부를 만한 위대한 발명품이 탄생한 것이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등장했을 때도 주프락시스코프는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에도 마이브리지는 말 이외에 사람, 동물, 새의 움직임을 사진으로 촬영해 주프락시스코프로 재생했다.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미국과 유럽 전역에서도 강연 요청이 밀려들었다.
1881년 프랑스를 방문한 마이브리지는 ‘크로노포토그래픽 건(Chronophotographic Gun)’을 개발한 에티엔-쥘 마레(Etienne-Jules Marey)와 만나게 된다. 생태학자였던 마레는 동물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총 모양의 사진기를 개발한다. 이 사진기는 동물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가는 대신 필름이 회전하면서 1초에 12장의 사진이 찍혔다.
공통의 목표를 지닌 마이브리지와 마레는 금세 의기투합해 공동 작업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마이브리지는 예술적인 태도로 마레에게 감명을 주었고, 반대로 마레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마이브리지에게 영향을 끼쳤다. 둘의 업적은 연속촬영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끌었고 바야흐로 ‘동영상(Motion Picture)’의 시대를 열었다.
1888년 조지 이스트먼(Geoge Eastman)이 돌돌 말린 롤 형태의 필름을 개발하고 1892년 사진용품 회사 이스트먼 코닥(Eastman Kodak)을 설립하면서 동영상 기술은 다시 한 번 전환기를 맞이한다. 원반을 이용한 주프락시스코프는 몇 초 동안의 움직임만 보여줄 수 있었지만, 롤 형태의 이스트먼 방식을 사용하면 몇 십 분짜리 영상을 촬영하고 재생하는 일이 가능했다. 영화라는 장르가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발명왕 에디슨이 1891년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를 발명했지만 기계 안을 혼자서 들여다보는 방식이어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던 1895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대륙의 곳곳에서 스크린 위에 상영되는 최초의 영화가 선을 보였다.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Auguste & Louis Lumière)는 가장 늦은 1895년 12월 28일에야 영화 상영 기술을 선보였지만 “기차가 달려드는 화면에 관객들이 놀라 영화관을 뛰쳐나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영화의 창시자로 등극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영화로 알고 있는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는 사실 이듬해인 1896년에 상영된 작품이다.
어쨌든 그 이후 영화 장르는 발전을 거듭했으며 오늘날 거대한 산업을 이루었다. 말 애호가인 스탠퍼드의 자금으로 땅을 마련하고 끈기 있는 마이브리지의 노력으로 씨앗을 심은 덕분에 지금의 영화인들은 풍성한 열매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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