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와과학

모르는 사람이 내 머릿속에? 영화 속 ‘다중인격’ (KISTI)

조조다음 2013. 2. 8. 11:15

 

 

고대 중국의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이라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반대로 순자는 사람의 성품은 본래 악하다고 반박하며 ‘성악설’을 내세웠다. 기독교에서는 선과 악을 구별하게 만드는 열매를 따먹는 바람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본다. 중동 지역에서는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이원론 중심의 마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 때로는 착하고 때로는 악한 다면적인 인간의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흥미로운 소재다.

의학이 발달하면 사람의 마음에서 선한 부분만 남기고 악한 부분은 말끔히 없애는 약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이러한 상상력에서 출발해 1886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해적 선장 존 실버를 따라 항해를 떠난 꼬마 짐 호킨스의 다채로운 모험이 담긴 ‘보물섬(Treasure Island)’의 성공 이후 다시 한 번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법학박사이자 의학박사인 지킬 박사는 인간을 ‘여러 개의 모순되면서도 독립적인 인자들이 모인 부조리한 집합체’로 규정하고 각 특성을 분리해내는 초록색의 약물을 발명한다. 선과 악이라는 대립되는 본성을 분리하고 하나만을 선택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낮에는 점잖고 학식 있는 지킬 박사로 살아가다가 밤이 되면 약물을 마시고 하이드 씨로 변해 억압된 스트레스를 분출한다. 후에 발견된 유서에는 “저항도 못하는 상대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한 대 한 대 칠 때마다 환희를 맛보았다”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변신이 반복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하이드 씨로 변하는 일이 잦아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거리로 나가 살인과 폭행을 일삼았고 약을 먹어도 지킬 박사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교수형이 무서워 자살하려 하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하이드 씨가 튀어나와 난동을 부렸다. 지킬 박사는 결국 스스로를 집안에 감금하다 흉측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가 교대로 나타나는 현상을 흔히 ‘이중인격’이라 부른다. 겉보기에는 착하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을 보일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선과 악이라는 대립되는 측면을 모두 지닌 인간의 극단적인 본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중인격의 대표적인 사례인 지킬 박사의 이야기는 1920년 무성영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Dr. Jekyll and Mr. Hyde)’로 처음 만들어져 문학과 연극에 이어 영화계까지 점령했다. 이후 1931년과 1941년에도 리메이크 돼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에도 비슷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끊이지 않고 발표됐다.

∎ 지금도 계속되는 지킬 박사의 이야기
대표적으로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유명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43년 작품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를 꼽을 수 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찰리 삼촌이 사실은 정체를 감춘 엽기적인 연쇄 살인마라는 설정으로 호평을 받았다.

1962년에는 심리적, 육체적 충격을 받으면 초록색 괴물로 변신하는 만화 주인공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Incredible Hulk)’가 선을 보였다. 지킬 박사와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헐크는 1970년대 TV영화부터 2012년 ‘어벤져스(Avengers)’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해 사랑을 받고 있다.


1996년에는 ‘이중인격 전문 연기자’라는 별명을 지닌 에드워드 노튼(Edward Norton) 주연의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가 화제를 모았다. 정신질환을 가장해 법원에서 무죄를 받아낸 살인자의 이야기다. 노튼은 1999년 ‘파이트 클럽(Fight Club)’에서도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무료한 생활에 지친 주인공이 친구의 권유로 격투 클럽에 가입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이중인격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는 내용이다.

2003년에는 프랑스 영화 ‘엑스텐션(Switchblade Romance)’와 미국 영화 ‘아이덴티티(Identity)’가 이중인격을 다뤘다. 영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에서 아라곤 역할을 맡았던 배우 비고 모텐슨(Viggo Mortensen)이 명연기를 펼친 2005년 작품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두 얼굴의 여친’과 ‘뷰티풀 선데이’가 비슷한 소재를 다루었다. 최근에는 영화 ‘호빗:뜻밖의 여정’에서 착한 ‘스미골’과 사악한 ‘골룸’이 등장하는 등 다중인격 캐릭터는 영화 속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독특한 캐릭터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 24개의 인격을 가지고 사는 빌리 밀리건
이중인격으로 소재로 한 영화는 배우의 능력에 따라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뉜다. 하나의 인물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인격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중인격 환자들도 혹시 연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는 것은 아닐까?

두 개 이상의 자아가 번갈아 나타나는 현상을 흔히들 ‘이중인격’ 또는 ‘다중인격’이라 부른다. 정식 명칭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DID)’다. 자아가 여럿으로 분리되고 따로 떨어지는 바람에 단일한 정체성을 보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증상을 가리킨다. 정신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빙의(Possession)’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다중인격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20개가 넘는 인격을 가지고 사는 윌리엄 스탠리 밀리건(William Stanley Milligan, 1955~)이다. 열 살 때인 1964년부터 계부 챌머 밀리건(Chalmer Milligan)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하면서 다중인격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본래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인격이 등장하는 식이다.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등 커다란 사건을 겪을 때마다 하나씩 새로운 인물이 윌리엄의 몸을 지배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격은 핵심 인격인 빌리(Billy)를 중심으로 아서, 레이건, 앨런, 타미, 대니, 데이비드, 크리스틴, 필립, 케빈, 월터 등 총 24개에 달한다. 강간, 폭행, 절도 등 수많은 범죄로 법원과 정신병원을 수시로 드나들던 1978년 미국 최초로 ‘다중인격 장애와 정신이상’을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다.

가짜 연기를 펼친다고 의심한 수사관과 의사들이 갖가지 검사와 취조를 실시했지만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발견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윌리엄은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이었지만 아서라는 인격이 지배하면 아랍어와 아프리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수학, 물리학, 의학을 전문가 수준으로 뽐낸다. 레이건일 때는 크로아티아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타미로 변신하면 전자제품을 능숙하게 다룬다. 단순한 연기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들이다.

다중인격이 발생하는 원리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환자의 90% 이상이 어린 시절 심각한 학대와 폭력을 겪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주체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기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아를 바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다중인격은 잠재적 범죄자라기보다 사회가 보호하지 못한 약자이며 피해자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