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된 한국형 좀비 드라마 <킹덤>에는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식물 ‘생사초’가 등장한다. 죽은 임금을 되살리기 위해 사용된 보랏빛 들풀은 임금을 살리기는커녕 좀비로 만들었고, 이 역병은 한양 너머 조선 전역에 퍼진다. 드라마를 이끄는 주요 플롯은 무시무시한 괴물을 만드는 생사초의 비밀이 무엇이냐에 있다. 평범한 식물이 과연 이처럼 동물의 마음과 행동을 조종할 수 있을까? 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물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식물은 어떤 무기를 사용할까?
식물 속 화학 물질, 환각을 일으키다
흔히 식물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을 꼽자면 뾰족한 가시나 긴 넝쿨, 식충식물의 특이한 잎처럼 외형상의 특징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할 뿐, 식물도 동물처럼 생존에 무수히 많은 화학 물질을 활용한다. 국제 자연 보전 연맹(IUCN) 레드 리스트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식물 종 수는 29만 700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이 가진 수백에서 수천 가지의 화학 물질은 각 개체를 둘러싼 환경에 맞추어 시시각각 구성되고 방출된다.
화학 물질이라는 단서로 동물의 행동 변화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식물을 바로 떠올렸을 수 있겠다. 양귀비의 아편 성분은 마약으로 가공되어 인간 개개인은 물론 인간 역사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모르핀, 코데인, 헤로인은 모두 덜 자란 양귀비의 씨방을 잘라 추출한 즙을 덩어리로 굳혀 가공한 것이다. 뇌와 척수에 효과를 발휘하는 아편 알칼로이드는 양지에서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의약품으로 쓰이는 반면, 그보다 훨씬 광범위한 음지에서 강렬한 황홀감을 불러일으키는 환각제로 사용된다.
아편 성분은 생리학적으로 심장 박동과 호흡을 늦추고 내장 기관의 운동을 담당하는 민무늬근을 이완시키는데, 내성이 생길수록 같은 효과를 보기 위해 더 많은 용량이 필요하다. 결국 양귀비의 아편을 과다 복용한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 생사초로 두 번 죽은 왕처럼 말이다.
대마초의 향정신성 성분 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THC), 코카잎의 트로판계 알칼로이드 역시 중독자의 정신을 파고든다. 사실 인위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원래 대마초와 코카잎에 포함된 마약 성분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내성이 생겨 장기적으로 많은 양을 복용한 사람들은 우울증과 수면 부족, 만성 피로에 끝내 정신 착란에 시달리기에 이른다. 이런 중독성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은 마치 피부 아래에서 곤충이 기어다니는 듯한 촉각 환각에 시달린다고 한다. 과거 영적 계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추출해 마신 안데스 지역의 줄기 식물 아야와스카, 남부 아시아 일대에서 즐겨 씹던 빈랑도 인간에게 황홀감과 행복감을 준 만큼 그에 못지않은 불행을 몰고 왔다. 이러한 마약성 식물은 중독 증세를 일으키거나 구강암과 식도암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인간은 몰랐던 식물의 위협
일반적으로 식물이 오랜 시간 지니고 진화해 온 화학 물질들은 인간처럼 몸집이 큰 동물에게는 대부분 큰 피해를 주지 않는다. 채소에서 나는 알싸한 맛이나 매운맛은 식물이 지닌 독특한 화학 물질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다. 우리 인간이 느끼기에 독특한 풍미, 때로는 기분 전환 요소 정도인 이 자극이 곤충에게는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가령 민트의 화한 맛을 만드는 테르페노이드는 신경 전달 물질 작용을 교란하는 방식으로 곤충이 방향 감각을 잃거나 죽게끔 한다. 또 고추냉이에 함유된 시니그린은 매운맛이 나는 성분으로 곤충의 천적인 말벌을 부른다. 사실 시니그린 자체에는 매운맛이 없는데, 곤충이 고추냉이를 갉아 먹으면 세포 내 시니그린이 세포 밖 효소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알릴겨자유라는 새로운 물질이 합성되어 말벌을 유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진딧물이 천적인 몇몇 식물은 정확히 그 진딧물의 포식자를 유인하는 휘발성 방향 물질을 만들어 진드기가 침입하는 순간 방출하기도 한다. 이 식물은 진드기의 침 속에 든 화학 물질을 분석해 진드기의 종류를 정확히 알아내어 살아남을 길을 찾는다.
드물게 말 정도로 큰 동물이 강한 독성을 띠는 특정 화학 물질을 많이 먹어 파킨슨병처럼 운동 근육을 제대로 쓰지 못는 사례도 있다. 미국에서는 밀집한 환경에서 사육된 농장 말이 원인 모를 이유로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죽는 일이 종종 생겼다. 알고 보니 은까마중이라는 보랏빛 잡초가 원인이었다.
북미 전역에서 자라나는 이 잡초는 일반적으로 말이 선호하는 맛은 아니다. 하지만 목초지에 사육 개체가 너무 많아 양껏 배를 채우지 못한 농장 말은 잡초라도 뜯어서 허기를 채워야 한다. 은까마중 전체에 말의 위장과 중추신경계 장애를 일으키는 글리코알칼로이드가 있어 이를 많이 섭취한 동물은 감각이 둔해지거나 호흡 곤란, 근육 약화를 일으키게 된다. 배고픔에 못 이겨 오랫동안 잡초를 먹은 말은 경련이나 마비,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죽기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구의 역사와 함께 진화해 온 식물은 인간이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다양한 생존 전술을 꽁꽁 숨기고 있다.
글: 맹미선 과학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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