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일, 한 물리학자가 던진 SNS 글 하나에 국민간식 라면의 새 역사가 열렸다. 찬물에서 라면과 스프를 넣고 끓였더니, 완벽한 면발을 얻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평소 양자역학의 권위자로 유명한 김상욱 교수의 글이기에, 상식을 파괴하는 조리법이지만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센스 있는 글 솜씨로 무장한 해당 게시물은 나름 [서론→동기→실험→결론→토의]라는 과정을 거쳤다. 이에 SNS상에서는 완벽한 라면 면발을 둘러싼 설왕설래와 진실게임이 한동안 이어졌다. 직접 따라 해보는 이들의 후기 역시 제법 등장했다.
그런데 정말 찬 물에 끓인 라면 면발이 더 맛있을까? 실제 라면회사가 밝힌 답변은 조금 달랐다. 일단 물이 끓기 전 면을 넣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 기본 입장. 그러나 정식 조리법이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고 한다.
핵심은 ‘변인 통제’와 ‘표준화’다. ‘차가운 물’이라는 표현 자체가 정확히 몇 도를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기에 그 차이에 따라 면발의 퀄리티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각 가정마다 제각각인 화력의 차이 역시 변수가 된다.
그에 비해 물이 끓는 100℃는 확실한 수치다. 이 역시 끓이는 사람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변수를 최대한 배제한 표준 방법이기에, 가장 안정적으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 라면 회사의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말들이 이어지자, 김상욱 교수도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SNS글을 다시 올렸다. 제대로 된 실험을 위해선 면발의 쫄깃한 정도부터 정량화해야 하는데, 각 잡고 실험할 생각까지는 없다는 것이 그 요지. 이렇게 흔하디 흔한 라면이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연구자들의 노고는 만만찮다.
라면의 과학을 알 수 있는 다른 사례로 ‘2개 이상 끓일 때의 물의 양’을 들 수 있다. 라면 1개의 정량이 550ml라고 해서,
2개를 끓일 때 1100ml을 넣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농심이 공식 블로그에서 내놓은 답변은 간단하다. ‘물의 증발’ 때문이라는 것. 물이 더 많을수록 냄비 전체에 열 전달이 더뎌지기에, 증발되는 물의 양도 줄어든다는 것이 그 요지다.
결국 증발량이 달라지기에 단순 더하기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550ml가 정량인 라면 기준, 2개는 880ml, 3개는 1,400ml가 최적의 맛을 내는 물의 양이라고 한다. 연구원들이 스프량을 미세하게 조절해가며 찾아낸, 일종의 황금비율이라 하겠다.
최적의 면발을 만들기 위한 연구 역시 치열하다. 가장 유명한 것이 진공에서 수분을 날려 보내 원재료의 풍미를 살리는 ‘Z-CVD’ 건조 공법. 또 뜨거운 바람을 쐬어 생면의 식감을 살리거나, 파스타 제조 기술을 활용해 쫄깃함을 더하기도 한다.
일명 ‘마법의 가루’라 불리는 라면 스프에도 최적의 배합을 위한 연구가 숨어 있다. 라면 스프에 들어갈 수 있는 원료는 대략 3천여 종류. 이중 25~50개 정도의 원료를 추리고, 배합하며 컨셉에 맞는 맛과 향을 찾아내는 것이 식품공학자들의 몫이다.
스프 자체 맛과 향은 물론이고 면발과의 궁합까지 맞춰야 하기에 최적의 조합과 비율을 얻기 위한 노력은 끝없이 이어진다. 매일 라면을 몇 번이나 끓이고, 맛을 보면서 이를 분석하고 개선하는 것이 연구원들의 일상이다.
결국 남녀노소 즐기는 라면 맛의 비결은 철저한 시장 분석과 개발 계획 그리고 반복 실험으로 도출한,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다. 요리하기도, 먹기도 손쉬운 라면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연구의 흔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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