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동아시아를 떠들썩하게 했던 책이 있다.
1613년 정식 발간 이후 수백 년 동안 중국과 일본에까지 지속적으로 소개되며 온갖 찬사를 불러 모은 책이다. 18세기 조선 정조 임금은 “고금의 의서를 통틀어 진실로 우리나라의 쓰임새에 적절함으로 판단하면 이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 1723년 일본의 후지와라 노부아스(藤原信篤)는 “이 책은 지금까지 떠돌던 이야기를 손으로 잡히도록 설명했으니 의학의 가르침과 바로잡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1747년 중국 학자 왕여존(王如尊)은 “이 책은 병세와 병증을 상세하게 설명해서 치료법을 적었고 그 원리를 밝혀놓으니 그야말로 의서의 대작”이라 평가했다. 1766년 능어(凌魚)는 “이 책은 이미 황제에게 올려져 명의임을 인정받았지만 아직도 비각에 갇혀 있어 사람들이 엿보기 어렵다”며 “천하의 보배는 마땅히 천하가 함께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다시 중국어 본을 펴냈다. ‘열하일기’를 지은 연암 박지원도 중국 땅에서 동의보감을 만나고 기쁨과 자랑의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 책에 대한 찬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5년 중국 장쩌민 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한·중 문화교류의 아름다운 역사를 빛낸 작품”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지난 2009년에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고 2013년 탄생 400주년을 맞았다. 이쯤이면 ‘이 책’이 무엇인지 다들 짐작했을 것이다. 조선의 어의 허준이 지은 불후의 명작 ‘동의보감(東醫寶鑑)’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의 정보 집대성한 아시아 최고의 의학서
동의보감은 당시 동아시아의 한의학 정보를 집대성한 일종의 임상 백과사전이다. 전체 구성은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등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의 의학으로는 내과질환, 외과질환, 유행병과 가정의학, 약제와 약물, 침과 뜸으로 나눈 셈이다.
네 권으로 이루어진 ‘내경편’에서는 인체의 구성 원리와 신진대사를 설명했고, 이어 다시 네 권의 ‘외형편’을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생김새를 보고 질병을 판단하는 방법을 소개했다. 열한 권의 ‘잡병편’에서는 체온, 구토, 부종 등 증상에 따른 치료법을 적었고, 세 권짜리 ‘탕액편’에서는 갖가지 재료를 이용해 치료약을 만드는 법을 설명했다. 마지막 한 권짜리 ‘침구편’은 침과 뜸 사용법을 담았다.
이처럼 다양한 질병의 치료방법을 담아 누구나 활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병의 발생 원인까지 상세하게 밝혔기 때문에 학술서로도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도 수백 수천에 달하는 기존의 수많은 의학 이론과 서적을 한데 모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써 한의학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당대 최고의 의서라 불리던 동의보감이지만 그 탄생 과정은 힘들고 복잡했다. 임진왜란이 나라를 휩쓸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96년 5월, 조선 선조 임금은 전쟁과 기근의 고통으로부터 백성을 구할 방도를 찾으라는 어명을 내린다. 어의 허준은 정작,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 유의와 태의 5인과 함께 의서 편찬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1597년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결국 선조는 의서 500권을 내어주며 혼자서라도 책을 집필하라고 허준을 격려한다.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600년 내의원에서 가장 높은 수의 자리에 오르고 두 번의 왜란 동안 임금을 보필한 공로로 1604년 ‘양평군’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자 다른 신하들의 질투를 사게 돼 허준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결국 1608년 선조가 급사하자 그 책임을 물어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허준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임금이 병이 많은데 경험 많은 의원이 부족하다”는 구실로 이듬해 귀양을 풀어주었다. 이후에도 허준을 내치라는 탄원이 수십 차례나 이어졌음에도 광해군은 의서 저술에 전념해야 한다며 중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덕분에 허준은 1610년 드디어 동의보감 완성 소식을 전했고 광해군은 말 한 필을 선물로 하사하며 속히 간행해 널리 퍼뜨리라고 명한다. 그러나 초안의 양이 워낙 방대해 교정과 필사에만 몇 년이 소요되자 활자를 이용해 인쇄하라는 명을 다시 내린다. 결국 1613년 11월 광해군 5년에 동의보감 활자본이 25권 25책으로 탄생해 조선의 높은 의학 수준을 동아시아에 널리 떨치게 된다.
➢소설과 드라마로 만들어져 한류 이끈 우리의 문화유산
동의보감에 얽힌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최근 소설과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드라마 작가 이은성은 1976년 집필한 ‘집념’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구성하던 중 1988년 타계해, 1990년에야 유작으로 소설 ‘동의보감’이 발간됐다. 1999년에는 전광렬 주연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아시아 곳곳에 ‘신의(神醫)’라는 제목으로 수출됐다.
탄생 400주년을 맞은 올해는 갖가지 행사가 줄을 잇는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보물 제1085-1호로 지정된 원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다양한 판본을 한데 모아 오는 10월 31일까지 ‘전통의약을 생활 속으로’ 전시회를 연다. 허준이 편찬한 의서와 한·중·일 각국의 전통의학 자료도 선보인다.
오는 9월에는 영어판 동의보감도 발간된다. 100여 명의 전문인력과 7억 7천만 원의 예산이 투입된 6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이다. 같은 달에는 경남 산청에서 동의보감 400주년을 기념하는 ‘2013 세계전통의약엑스포’가 열린다.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허준박물관’은 연중 언제든 동의보감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도 듣고 한약 체험도 해볼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까지 오른 불후의 명저 ‘동의보감’. 질투와 역경을 딛고 방대한 저술을 완수한 허준의 집념 덕분에 우리는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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