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세 개의 단어, '밥' '함께' '먹자'
/김수우 시인·백년어서원 대표
어느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가훈을 선물했다. '밥 함께 먹자', 세 단어이다. 너무 단순하고 평범한데 울림이 강했다. 두 달 전 가족끼리 소박한 결혼식을 치렀다는 가까운 지인의 이야기다. '밥' '함께' '먹자' 세 단어는 누구나, 언제나 쓰는 말이고 또 어디서나 듣는 말이다. 그 울림이 큰 건 너무 쉽고 당연한 이 말이 너무 어렵고 절실한 시대라서가 아닐까.
'형식이 돼 버린 밥'은 의미 전도
국수 한 그릇이라도 진실이 중요
제대로 먹는 밥이 신을 깨우는 일
반성하게 된다. 그럼 그동안 함께 먹은 건 '밥'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모였던 건 '함께'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입안에 떠넣은 건 '먹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밥'은 곧 우리의 몸이면서 근원적인 자연이다. '함께'는 관계의 철학으로 우리가 이 지구에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먹자'는 모든 행위 가운데서 가장 생명적이고 숭고한 행동이다. 그 때문에 그 짧은 문장이 어떤 시편보다 더 푸른 파동으로 번져 오는 것이리라.
이 상투적인 세 단어에 존재론적인 인문의 세계가 고스란하다. 단순한 문장 속에 존재의 경이와 영적인 예지가 오솔길을 만들고 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대지와 인간이 교통하는 지극한 행위인 것이다. 결코, 가벼울 수 없고 기계적일 수 없다. 함부로 반복되는 일상이 아닌 것이다. '밥 함께 먹는' 형식이 존재의 내용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나 그 형식이 오히려 존재의 의미를 휘발시키면서 소비적인 일상을 만든다면 결국 삶은 불안으로 절뚝일 수밖에 없다. 형식이 되어 버린 밥, 형식이 되어 버린 관계가 불신과 불안의 시대를 그대로 보여 준다.
함께 먹는 밥이 감천(感天)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세 개의 단어 하나하나는 휴머니즘 자체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 단어는 철저하게 실용적인 세계가 되어 버렸다. '밥'은 생명의 누림이나 성장이 아니라 아주 도구적인 방편이 되고 말았다. '함께'는 교감이 아니라 서로의 편리에 의해 서로를 대상화시키고 있다. '먹자'는 아주 소비적인 형태로 삶 전반을 지배한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 사람들은 온통 먹는 일에 집중하는 것 같고, 음식은 극단적인 소비가 되고 있다.
밥 함께 먹는 일이 도구적이 되었다는 건 행복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영한다. '밥을 함께 먹는' 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타자를 사랑하는 방식이며 동시에 자기 영혼이 성장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고결한 일상이 그저 경쟁과 성과 중심이고, 삶을 견디기 위한 방편으로 떨어지진 않았을까. 함께 먹는 밥보다 보험을 우선 선택하는 현실이다. 왜 우리는 보험만 믿게 되었을까. 그래선지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다. 먹어도 먹어도 외로운 것이다.
'전쟁' '도발'이라는 단어 속에 며칠 긴장하는 가운데 '밥 함께 먹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닫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국어를 배우면서부터 반백 년 노래하면서도 '밥 함께 먹을' 궁리를 하지 못한 현실이 참 아프다. 그뿐만 아니다. 밥을 함께 먹지 못한 고통이 이 모퉁이 저 모퉁이에서 우리를 얼마나 섬뜩하게 하는가. 결국, 가슴속에 세월호를 빠뜨리고 말았으니.
밥을 함께 먹는 건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본능이다. 그 교감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그땐 어떤 희망도 절망도 결코 지루하지 않다. 밥을 함께 먹지 못하는 사회는 부자든 가난하든 노예의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밥을 제대로 함께 먹는 일은 개인의 기적을 만들고 공감의 능력을 만든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나를 내려놓는 말이다. 경쟁을 버린다는 말이다. 그립다는 말이고 앞으로도 기다린다는 말이다. 내 것을 손해 보겠다는 말이다. 공존을 위한 책임은 제대로 함께 먹는 밥 한 그릇에 있다.
'밥 함께 먹자'라는 가훈이 석탄광산의 카나리아처럼 선명하게 다가온다. 사실 어떤 답도 없는 시대가 아닐까. 밥을 함께 먹는 것 외에는 말이다. '밥 함께 먹자'라는 단순한 표현대로 그 실천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다. 히말라야를 걷는 일도 죽은 나무를 심는 일도 아니다. 국수 한 그릇 앞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마주 앉으면 된다. 그 한 그릇 한 그릇이 곧 순례인 것이다. 신이 잠들었으면 깨워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는가. 제대로 함께 먹는 밥이 곧 신을 깨우는 일이 아닐까, 곰곰 따져 본다.
215. 8. 25 부산일보